신하들이 왕한테 얼마나 빡쳤는지 알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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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왜적이 북상하니 나는 요동으로 도망가겠다

신하: 미쳤나? 나라의 기둥이 어찌 국외로 도피한다는 말인가? 절대 안된다

선조: 그러면 광해군을 세자로 삼겠다. 이러면 국본이 2명이 될테니 나머지 한명은 국외로 도피해도 괜찮지 않겠나?

신하: 그래도 안 된다. 왕이 모든 국사를 책임지고 있는데 어찌 그리 도망갈 생각만 하느냐?

선조: 그러면 세자가 국사를 볼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겠다. 이러면 되겠는가?

신하: 말도 안된다. 그리되면 조정이 둘로 갈라져 명령체계에 혼란만 줄 뿐이다. 제발 여기에 남아라

선조: 그러면 아예 세자에게 왕 자리를 양위하겠다

신하: 진짜 미쳤나? 이러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조선시대에 필부(匹夫)는 벼슬을 하지 않는 보통 사람으로 통칭되는 용어였지만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사람을 지칭할 때도 많이 쓰였던 단어였음.

따라서 국왕 보고 필부라고 말하는 사대부들은 거의 없었음. 함부로 말하면 뒈지니까 당장 그 연산군과 광해군, 심지어 인조조차도 비판을 받을 때 필부라는 말은 듣지 않았음.

<선조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초상화>

그런데 재위기간동안 이 필부라는 단어를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들은 국왕이 있었으니 바로 선조였음. 특히 임란 발발 직후 선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 실망한 백관들이 선조에게 간언할 때 이 단어를 대놓고 자주 사용함.

(1)

(선조가 왜군을 피해 요동으로 가겠다고 하자 대신들이 말하기를,)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의논을 들은 뒤로는 신민들이 경악하였으나 달려가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니 그 안타깝고 절박한 실정이 난리를 만난 초기보다 심하여 허둥지둥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 · 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명나라에서 대접하여 허락할는지의 여부도 예측할 수 없으며, 일행 사이에 비빈(妃嬪)도 뒤떨어져 갈 수 없는데, 요동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여 복색(服色)도 다르고 말소리도 전혀 다르니, 비웃고 업신여기며 무례(無禮)히 굴면 어떻게 저지하겠습니까. 비록 요동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풍토와 음식을 어떻게 견디시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요동으로 가는 문제는 신들은 결코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4일자 기사

– 요동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전한 선조에게 필부를 운운하며 반대하는 대신들. 선조가 임란 직후 처음으로 필부 드립을 들었던 시점임.

(2)

<신립의 형인 신잡의 초상화>

<신잡이 아뢰기를,

“이 도(道)의 인심이 크게 소란한 까닭은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일 장전(長奠)으로 간다면 그 중간의 길이 험하고 어려운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겠지만 난에 임하여 강을 건너게 될 때 그곳의 인심 또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지나치다.”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 <선조실록>; 1592년 8월 2일자 기사

– 몇 달후 선조가 또다시 요동으로 도주해야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신립의 형인 신잡이 선조에게 필부 운운하면서 만약 요동으로 간다면 조선의 왕으로 볼 수 없다고 대놓고 간언하고 있음.

(3)

<윤두수의 초상화>

좌의정 윤두수가 아뢰었다.

<“삼가 상의 분부를 보건대 놀랍고 황공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의 이 왜적의 침구는 천지간에 아직 없었던 변고입니다. 정돈하여 회복을 도모하기에도 겨를이 없어 미치지 못할까 오히려 두려운 지경인데, 어찌 스스로 필부들의 거취처럼 하시어 외정(外廷)에서 드러내어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들이 평소 성상께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 <선조실록>; 1592년 10월 19일자 기사

 

– 선조가 자신의 특기인 양위쇼를 전개하자 윤두수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경황이 없을 지경인데 왜 필부처럼 쓸데없는 행동을 하냐며 선조를 비판하고 있음.

(4)

<류성룡의 표준영정>

(영의정 류성룡 등이) 재차 아뢰기를,

<“하늘이 일각이라도 운행을 정지하면 만물이 질서를 잃게 되고 일월이 일각이라도 비추지 않으면 백물(百物)이 우러를 바가 없게 됩니다. 임금이 이를 본받아 도를 행하여 만방에 조림(照臨)하는 것인데, 지나치게 스스로 비박(菲薄)하게 여겨 필부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내시기만을 구해서야 되겠습니까? 

상께서는 이런 어려운 때를 당하여 채찍질하고 분발하여 만백성의 기대에 답하시지 않고 도리어 대단치 않은 병을 이유로 대위(大位)를 내놓으려 하시니, 흩어진 인심을 어떻게 수습하며 기울어진 국세를 어떻게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저궁(儲宮)께서 멀리 계시어 갑자기 돌아오기가 어렵고 천리길에 어보(御寶)를 전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국사는 지극히 중대하고 하늘의 마음은 두려운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재삼 생각하시어 후회가 없게 하소서.”>

– <선조실록>; 1593년 12월 1일자 기사

– 또다시 양위쇼를 하는 선조에게 류성룡이 백관들을 이끌어 필부를 운운할 뿐만 아니라 아예 대놓고 선조의 비상식적인 양위쇼를 비판하고 국왕으로서 모범을 보이라고 충고하고 있음.

(5)

양사(兩司)가 합계하였다.

<“(…) 성상께서 굳게 성지(聖志)를 정하시고 한결같은 뜻으로 담당하시더라도 오히려 극복해 내지 못하게 될까 두려운데, 이제 지나치게 겸손하시며 기필코 인사(人事)를 사절하려고 하시기를 마치 필부(匹夫)의 행위처럼 하시니, 장차 국가의 일을 어디에다 두시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

– <선조실록>; 1596년 8월 28일자 기사

– 선조가 광해군에게 섭정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보이고 백관들의 입시를 허락하지 않자 사헌부와 사간부에서 필부 운운하며 선조의 전교에 대해 반대함과 동시에 비판하고 있음.

(6)

<“(…) 이번의 섭정에 관한 명은 곧 전하의 크게 잘못된 거조이십니다. 시기의 가부와 사세의 어려움은 다 생각해보지 않으시고 국사를 모른 체 놓아두고서 필부처럼 물러날 생각만 하시니 재앙이 나타날 것은 물어볼 것도 없고 실패가 닥칠 것도 분명합니다. (…)”>

– <선조실록>; 1596년 윤 8월 14일자 기사

– 선조가 계속 섭정의 뜻을 굽히지 않자 홍문관에서 재차 상소를 올렸는데 이전보다 선조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훨씬 세졌다는 걸 볼 수 있음.

(7)

대사헌 이헌국 등이 다시 아뢰기를,

<“이미 대신에게 유시하였다는 비답(批答)을 받고, 신들이 전후에 내린 전교를 가져다가 보니 말씀이 일방적이어서 마치 군하(群下)의 뜻을 살피지 못하심이 있는 듯합니다. 전하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많이 보아 의리를 환히 알고 계신데 뜻밖에도 유독 이 일은 깊이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

문을 닫고 들아앉아 죄를 기다리는 것은 필부가 비난을 피하는 방법인데, 어찌 임금이 행할 바이겠습니까.”>

– <선조실록>; 1598년 9월 23일자 기사

– 1598년에 조선에 왔던 명나라의 관리 정응태가 명나라에게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여 자국(명)을 치려 한다는 등의 무고를 하자 선조가 이러한 사태는 모두 나 때문이고 따라서 백관들 볼 명목도 없으니 세자인 광해군과 함께 알아서 일처리를 하라고 하면서 문을 닫아 조회를 보지 않자 이에 대해 이헌국 등이 올린 상소임. 역시 선조를 필부와 동일시하면서 비판하고 있음.

(8)

(승)정원이 아뢰었다.

<“(…) 전하의 한 몸에 종묘와 사직이 달려 있으니 그 짐이 얼마나 막중합니까. 그런데도 만기(萬機)를 사절하고 들으려 않으십니다. 군기(軍機)의 성패는 한 번 숨쉬는 사이에 결판이 나는 것인데도 처분하지 않으시고, 명나라 장수의 자청이 성화처럼 급한데도 가부의 결정을 하지 않으시며,

심지어 사직과 종묘를 버리고 자기 몸만을 깨끗이 하려는 필부처럼 행동함으로써 산으로 올라가거나 바다로 들어가려 한다는 모함에 스스로 빠지려 하시니, 신들은 천하후세에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할지 감히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조종(祖宗)의 혼령께서 나에게 후손이 있다고 어찌 말하려 하시겠습니까. 속히 슬기로운 생각을 돌리시어 군정(群情)을 편안하게 하소서.”>

– <선조실록>; 1598년 9월 23일자 기사

– 역시 정응태 무고사건 때문에 선조가 계속 조회를 보지 않고 대신들이 올리는 상소도 싹 다 무시하자 승정원이 아뢴 상소문이다. 선조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훨씬 세고 만약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면 훗날 어떤 임금으로 보이겠냐며 대놓고 까고 있다. 게다가 하늘에 계시는 전조의 국왕들을 대할 낮이 있겠냐고 말하는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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